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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6-11본문
"단톡방에서 확인해 봤어요. 전부 500만 원씩이더라고요."
의뢰인은 법원에서 온 공탁 통지서를 내밀며 말했다. 통지서를 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보증금 2억 원을 경매절차에서 조차 회수할 수 없는 전세사기 피해자였다.
신혼집을 구하며 모은 돈에 대출을 보태 마련한 전부였다. 계약이 끝나면 그 돈으로 조금 더 넓은 집을 구할 계획이었다고 했다. 가해자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고, 선고를 앞둔 어느 날 피해자들에게 일제히 공탁 통지가 날아들었다. 금액란에 적힌 숫자는 500만 원. 딱 피해액의 5%였다.
피해자들의 단체대화방이 잠시 술렁였다고 한다. 가해자가 드디어 피해 회복에 나서는 것인지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금액을 확인한 순간 대화방은 조용해졌다. 수백 명의 임차인, 평균 1.5억 원 안팎의 보증금을 잃은 사건이었다. 가해자가 공탁한 돈을 전부 합쳐도 피해자 몇 사람의 보증금에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공탁이 판결문에서는 '피해 회복을 위한 노력'이라는 양형 사유로 기재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제도가 안고 있는 현재의 모습이다.
형사공탁이라는 제도가 있다. 가해자가 피해자와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경우, 피해 회복 명목의 금전을 법원에 맡겨 두는 절차다.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가해자가 합의를 빌미로 피해자의 주소를 알아내 찾아가는 2차 가해를 차단하고, 피해자가 원치 않는 대면 없이도 금전적 회복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도는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피해 금액에서의 공탁 비율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재판부가 공탁을 양형에 유리한 사정으로 고려하는 실무가 자리 잡자, 선고 직전에 기습적으로 공탁해 피해자가 의견을 밝힐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기습공탁'이 나타났다. 공탁으로 감형을 받아낸 뒤 피해자가 수령하지 않는 사이에 공탁금을 슬그머니 회수해 가는 '먹튀공탁' 까지 등장했다. 그리고 전세사기 사건에서는 또 하나의 변형이 목격되고 있다. 피해액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소액을 형식적으로 걸어 두고 반성의 증거로 삼으려는 공탁이다. 수백억 원을 편취한 이가 수천만원을 걸어 두고 선처를 구하는 풍경. 그것을 반성이라 부를 수 있을까.
다수의 전세사기 사건을 대리하면서 이런 공탁을 여러 차례 보아 왔다. 통지를 받아 든 피해자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분노보다 먼저 오는 것은 허탈함이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과 돈이 고작 이렇게 계산되는구나, 하는.
피해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받자니 가해자의 감형에 동의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 같고, 안 받자니 그 돈마저 아쉬운 형편이다. 보증금을 잃은 뒤 월세와 대출이자를 동시에 감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500만 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해자는 바로 그 절박함까지 계산에 넣었을 것이다. 필자가 만난 어느 피해자는 그 돈으로 밀린 월세부터 냈고, 또 다른 피해자는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작년부터 개정법이 시행되고 있다.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법원은 판결 선고 전에 피해자 측의 의견을 청취하여야 하고, 공탁법 개정으로 형사공탁금의 회수는 원칙적으로 제한된다. 피해자가 회수에 동의하거나 확정적으로 수령을 거절한 경우 등이 아니면 가해자가 공탁금을 도로 가져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적어도 감형만 챙기고 돈은 회수해 가는 일은 어려워졌다.
그날 필자는 찾아오신 분께 몇가지를 말씀드렸다.
첫째, 공탁금을 수령하더라도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수령과 처벌불원의 의사표시는 별개의 문제다. 돈은 돈대로 받고, 엄벌을 바라는 탄원서는 탄원서대로 제출할 수 있다. 그 돈을 받는다고 해서 가해자를 용서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피해자들이 알았으면 한다.
둘째, 의견을 밝힐 권리가 있다. 개정법에 따라 재판부는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500만 원이라는 금액이 2억 원의 피해 앞에서 어떤 의미인지, 그 공탁이 진정한 반성인지 양형을 위한 계산인지를, 피해자 자신의 언어로 재판부에 전달할 수 있고 또 전달해야 한다. 침묵하면 공탁은 서류로만 남지만, 재판부는 피해자의 의견을 귀담아 듣는다.
셋째, 받지 않을 권리도 있다. 수령을 거절하고 그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것 역시 피해자의 선택이다. 어느 쪽이든, 그 선택의 주인은 피해자 본인이어야 한다.
의견서를 내기로 했다. "피해자들의 절박한 사정으로 공탁금을 수령하나 이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용한 양형 반영은 타당하지 않다"고. 500만 원이라는 공탁금이 반성인지 모욕인지를 가려내는 일은 법원의 몫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 판단의 결과를 피해자들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 필자의 몫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