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키스톤 전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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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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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님, 전체를 파악 못하고 있을까봐 두렵습니다.”

주중 회의를 마치고 “혹시 더 보고해 주실 것 있나요?”라는 필자의 물음에 전주임님이 조심스레 걱정을 토로한다. 평소 질문도 의문도 실수도 태만도 없이 꿋꿋하고 묵직하게 일해오시던 주임님의 어두운 표정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한 사람의 일이 너무 많다.’

이유인 즉, 한 사건에 투입되어야 하는 업무가 과중하기 때문이다. 전세보증금 사건을 주로 처리하는 필자 사무실의 특성상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찾아오신 의뢰인, 그리고 경매 절차에 넘어가서 집을 나와야 하는 상황, 최악의 경우 전세사기의 피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경우 소장을 접수하는 업무에 더불어 부수 업무가 상당 부분 발생한다. 임차권등기를 통해 우선변제권을 기재해야 하고, 임대인 책임재산에 대한 사전 확인이 필요하며, 보전처분을 해야 한다. 이후 공탁을 실행하고, 배당요구기한도 체크, 본안이 확정되면 압류로 이전한다. 재산조회, 재산명시, 채무불이행자명단등재, 유체동산강제집행, 소송비용 확정신청, 추심금지급신청서, 추심신고서, 공탁금출급확인 등 한 의뢰인의 1억원 보증금 반환청구에 들어가는 부수 업무만 10 여개가 넘어간다. 그리고 이러한 신청사건은 법률사무원들이 대부분 조력하여 처리가 이뤄진다.


의뢰인이 단 10명이라도 주임님은 100개 사건을 머리 속에 넣어야 했으리라.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루 수 십 통의 전화를 응대, 상담을 챙겨주시고, 변호사 일정을 확인하고, 재판 일정을 조정해 왔을 것이다. 그이의 모니터 옆 수 많은 메모지가 붙어있는 이유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한계에 도달하여 그 많은 진행을 모두 장악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전부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느끼자 단 한 번도 “힘들다”는 표현을 직간접적으로 하신 것이다.

필자는 자주 “피해자들은 우리 아니면 갈 곳이 없고 우리가 마지막 기댈 곳입니다” 라는 표현을 하는데 정작 가장 가까이서 필자를 가장 많이 돕고 있는 분이 얼마나 힘들지 세심히 챙기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필자는 인복(人福)이 있는지 모르겠다. 나의 일을 돕는 사람이 그 일을 자기 일이라고 해주고 있으니 말이다. 

키스톤(Keystone, 쐐기돌) 이란 건축학에서 아치형 구조물의 정점에 놓이는 돌을 뜻한다. 크기는 작을지 모르나, 이 돌이 빠지는 순간 아치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에 구조물 전체의 하중을 가장 묵묵하게 견뎌내야 하는 핵심적인 존재다.

사람들은 흔히 화려한 스펙이나 언변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를 유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가 현장에서 목격한 진정한 ‘키스톤’의 자격은 다르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서류 한 장으로 치부하지 않는 공감 능력, 그리고 그 무게를 알기에 ‘혹시라도 내가 놓쳐서 이 아치가 무너지면 어쩌나’를 끊임없이 되묻는 그 숭고한 두려움에 있다. 주임님이 느꼈다던 그 ‘두려움’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우리 사무실의 키스톤임을 증명하는 훈장과도 같다. 의뢰인의 전 재산이 걸린 문제를 내 문제처럼 여기지 않는다면, 그토록 많은 사건의 디테일을 놓칠까 봐 두려워하며 하중을 견딜 이유조차 없을 테니 말이다. 그 떨림은 무능이 아니라, 직업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책임감의 발로다.


세상은 소리 높여 자신을 증명하는 사람들에게 주목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진짜 지탱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타인의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밤잠을 설치는 이들의 고요한 헌신에서 나온다. 화려한 조명은 받지 못할지언정, 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진짜 쐐기돌이다.

오늘, 퇴근길에 주임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건네야겠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신의 그 단단한 책임감 덕분에 벼랑 끝에 선 누군가가 다시 일어설 힘을 얻고 있다고. 그리고 그 두려움이라는 무게를 기꺼이 짊어져 준 당신이 있어 나는 참으로 든든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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