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최고관리자 작성일26-01-14본문
아내는 늘 7시 이전에 출근길에 오른다. 맑은 아침 공기와 붐비지 않는 버스, 일찍 도착한 회사 앞 카페에서의 여유로운 커피 한 잔,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며 오롯이 나에게 투자하는 시간을 위해서란다.
필자는 늘 아내의 출근 후 한참이 지나 안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밝기를 가늠하려 실눈을 뜨고는, ‘아 이 정도면 출근시간이구나’ 확인하며 침대 밖으로 겨우 한 발을 옮긴다. 아직 어린 딸은 강아지와 토끼 인형을 꼬옥 품에 안고는 자고 있고 부엌은 고요하다. 커피 한 잔을 내리고는 만화영화를 틀어 소리에 아이가 깨기를 기다린다.
아내는 남들보다 빠른 출근 이후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계획한다. 퇴근 후에는 집안일과 육아에 몰두하고 아이가 잠들면 다시 오롯이 본인을 위한 발전의 시간을 소요한다. 이미 변호사로서의 경력과 몸집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은데도 굳이 필요할까 싶은 영어 공부를 하기도 자격증 공부를 하기도 한다.
필자는 퇴근 후 하루 종일 공판에, 상담에, 선고에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핑계로 맥주 한 캔 톡 하니 까서는 탄산을 목구멍에 부어 넣으며 지루함을 이겨내려 쇼츠를 본다. 아이와 간간이 놀아주기는 하지만 육아는 아내의 비율이 대략 대부분을 차지한다. 야근 하며 밀린 업무처리를 하기도 하지만 사실 “내일의 나를 더 믿었던” 과거의 불성실함이 가져오는 처벌일 뿐, “왜 미리 안 했을까” 자책이 남을 뿐이다.
새해 아침, 필자는 아내에게 이야기한다. “새해지만 겨울이고 추우니 그냥 정시 출근하고 같이 따뜻한 내 차로 출근해요.” 잠시 뜸을 들이던 아내는 최근 읽고 있는 책 한 권을 이야기 해 준다. 마이클 이스터라는 미국 저널리즘 교수의 “편안함의 습격” 이라는 책인데 대략 이런 내용이란다.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배고픔과 추위,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며 살아왔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이 발전하며 우리는 인류의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가장 안전한 시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우울감, 비만, 만성통증, 무기력증을 가져왔고 결국 사소한 불편함과 지루함조차 이겨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 몸은, 우리 뇌는 이를 생존 위협 수준의 스트레스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우리는 다시금 배고픔을 이겨내고 추위를 겪어내고 자연스러운 몸의 움직임을 유지하며 죽음을 기다리며 나약해진 자신을 살아있는 삶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늘 순간의 성실함을 이야기했던 필자가 새해를 시작하며 아내로부터 받은 귀한 선물이지 싶었다. 필자는 바쁘게 살 뿐 능동적으로 살고 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지만 개인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임무를 꾸역꾸역 이행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 달, 한 해 혹은 몇 년을 이어가는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수십 년 반복된다면 점점 나약해져 가는 나를 뒤늦게 발견할 것이 뻔하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문득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걸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잠결에 바라보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녀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미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 풍요의 시대에 나를 지탱하는 힘은 스스로를 불편함으로 몰아넣는 매일 새벽의 반복된 결정이라는 것을. 필자가 피로를 핑계로 맥주 한 캔을 따며 안주할 때 묵묵히 구두끈을 묶어 한 아이의 엄마이자 한 조직의 변호사로서 고군분투 해왔던 것이다. 그녀는 내 아내이기 이전 어쩌면 삶을 진지하게 대하는 숭고한 통찰을 가진 존경스러운 나침반의 모습이었을지 모르겠다.
새해. 그이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존경으로 표하며 한 해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