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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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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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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졸업 후 인턴, 레지던트 등 과정이 있는 이유는 '배움과 적용'은 다를 것이고 적용에는 반드시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경험 중 겪는 실패나 힘겨움은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 성장이라는 결과를 가져다준다.

마찬가지로 한 분야의 전문가인 변호사들에게도 연습 과정이 주어지는데, 로스쿨 졸업까지 오롯이 학생이었던 이가 법정에 설 수 있는 '변호사'로 변화할 수 있도록 변호사법은 연습 기간을 요구한다.

이를 '6개월간 실무수습 기간'이라고 하는데 민사 변론기일을 참관하거나 형사 공판기일 증인신문을 보거나, 검경에서의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 과정에 함께하기도 하고 상담을 들어가 의뢰인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준비서면 작성 후 소위 '빨간펜'이라고 하는 수정 작업을 겪는 변호사로서의 삶을 간접적으로 배워 나가기도 한다.

아마도 가장 혹독한 순간은 이 '빨간펜' 작업인데, 로스쿨 과정에서 배운 지식과 수험 공부를 하며 쌓아온 기초가 온통 흔들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변호사시험 역시 소위 '서면'이라 불리는 소장 등을 작성하는 능력을 시험하지만 실무와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대여금 청구 소장을 작성하는 문제가 나오는 경우 상대방의 예상되는 항변, 즉 소멸시효, 변제, 상계 등 모든 법리상 쟁점을 나열하고 다시 재항변을 하며 굉장히 많은 쟁점들을 하나하나 짚어나가지만 실무에서는 대여 사실 즉, 금원을 빌려줬다는 사실 자체를 입증하는 것부터 막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앞에서 말한 수습기간을 겪었었고 소위 '사수'라고 불리는 선배님 사무실에서 변호사로서 꼭 필요한 경험들을 쌓았었다. 시간이 흘러 필자 사무실은 법무부 지정 법률종사기관이 되었고 현재 수습 변호사님을 모시고 있다.

수습 변호사님은 주로 '시보님' 이라 불리는데, 우리 사무실은 지난 2월부터 오 시보님이 와 계신다. 다양한 사건과 기술들을 경험하게 하려 노력하고 있으나 나의 사수만큼 좋은 변호사로 기억될지는 의문이다.

어느 날인가 필자는 외부 일정으로 사무실에 없었고, 업무 확인차 사무실에 전화하니 의뢰인과 통화 중이란다. 시보님 전화가 끝나시면 메모를 남겼는데 한 시간, 두 시간… 결국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본인이 상담할 일이 특별히 없는 사건인데 무슨 이야기를 그리 오래 계속했나 궁금했다. 퇴근 시간이 지나 회신이 왔는데 이혼 사건을 진행 중인 의뢰인과 서너 시간 통화를 했단다. 본인의 힘든 마음을 시보님께 토로하는데 위로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갔다는 말에 순간 빨간펜을 들었다.

“시보님, 그러면 일 못합니다. 관련 쟁점만 확인하면 되고 개별 사정들 굳이 다 케어해가며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사건 쟁점 아니면 메모를 남기라고 하세요.”

반나절을 날린 시보님께 수고했다는 말이 아닌 틀렸다는 빨간펜을 그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그 의뢰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략 죄송하다는 이야기였는데 바쁘신 분들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한 것 같아 어젯밤 후회가 되면서도 고맙고 미안하다는 취지였다. 더하여 어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분께 꼭 감사의 말씀을 전해달란다.

문득 필자의 수습 기간이 떠올랐다. 전문적 지식이 있다는 이유로 어린 나에게 사건을 묻는 사람들이 고마웠고 모두의 사정을 헤아리고 싶었으며 사건뿐 아니라 당사자들의 마음을 보듬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지금은 잊고 있었으나 사건이 마무리된 뒤 한 번 사무실에 오시라고 말씀드려 손을 잡아드리고 다시는 이런 일 겪지 마시죠라며 위로를 했었다.

오 시보는 옳은 첫걸음을 가고 있었고 필자는 길에 조금 벗어나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을 잊고 사건과 쟁점만을 보는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빨간 펜질을 한 것이 순간 후회되는 하루였다.

익숙함은 계속된 성장을 막는다. 단순히 성장이 없으면 다행이지 퇴행을 가져오기도 한다. 관성이나 타성에 젖어 시스템화되어버린 일상은 처음의 마음을 잊고 겸손하지 못한 삶을 살게 만든다. 초심을 찾게 도와준 오 시보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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