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 변호사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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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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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적인 T형 인간. 나중에 애가 닮을까 무섭다."



 신년 초, 대학 동기들과의 술자리, 또 필자를 놀리며 품평한다. MBTI 이야기인데, 판단에 있어 논리와 분석을 중시하는 T(Thinking) 성향과 상황과 감정을 중시하는 F(Feeling) 성향 분류를 이야기한 것이다. 평소 공감에 서툰 모습 때문에 "극T인간" 이라는 평가를 자주 받는데 또 뭔가 대화를 하다 공감을 전혀 안 한다며 한 소리 들었다. 나는 진정 그리 차가운 인간인 걸까. 



 3년 전쯤, 어린 여성이 3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아주 어린 아이를 안고 사무실을 들어왔다. 유독 키가 작은 분이었는데, 심각한 폭행에 시달리다 결국 이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이 악랄한 남편은 폭행의 증거가 남을 것까지 대비하여 녹음이나 촬영이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의 복부나 허벅지를 가격하는 등 외상이 존재하기 어려운 방식의 가해를 반복했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학력도 좋고 수입도 괜찮은 남편은 모든 재산까지 본인의 명의로 정리해 두었으며 시아버지, 시어머니까지도 재력이 있었다. 반면 의뢰인은 직업도 없고 부모님은커녕 친척들도 없을 뿐 아니라 자신 명의 재산조차 없어 만일 재판상 이혼에서 양육권이 쟁점이 된다면 어린 두 아이의 양육권을 뺏길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어린 의뢰인은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아이만이라도 데리고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서 살 수 있게 해달라며 애원했다. 한없는 흘리는 엄마의 눈물, 그리고 그를 놀라 바라보는 아이, 그 아이를 꼭 안은 품을 바라보며 울지 말라 했다. 앞으로 2년. 긴 싸움을 해야 하고 모든 순간이 버거울 텐데 그때마다 울면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이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며 넉넉한 핑계 대지 말고 아이 둘 제대로 키울 재산과 양육비를 칼같이 받아내자고 했다. 끄윽 거리며 고개만 끄덕이던 어린 친구와 함께 시작한 긴 싸움은 2년 뒤 항소심에 와서야 결국 두 아이의 양육권과 상당한 재산분할, 그리고 양육비를 지급받을 수 있는 타당한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항소심 확정 판결문을 받으러 온 날, 어린 의뢰인은 필자에게 한 번 안아주면 안 되느냐 했다. 이제 사건이 마무리되어 더 이상 나를 만날 일이 없는 순간 그 아이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잘 이겨냈어요."라며 그 작은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직 어린, 그러나 그 새 성장한 두 아이의 어머니는 한참을 울었다.


 문득 나의 할머니가 생각났다.



 어릴 적, 꽤나 큰 버스를 타고 유치원을 다녔었는데 하원 중 누워 잠이 들었다. 기사 아저씨는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왔고 주차를 마친 뒤 나를 발견했던 것 같다.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는 두려움과 혼자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막막하던 그 순간 유치원 바로 옆 외할머니 댁으로 울면서 걸어갔다. 그렇게 대문을 열고 흐느껴 들어가 안긴 할머니의 품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내 삶에 그 순간보다 포근한 위로와 안심은 없었을 것이다.


 그 날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나는 작은 위로로 남았을까.


 변호사로서의 삶에 감정이나 공감은 도움이 안 된다. 사법부에 "안타까운 상황"이나 "불쌍한 처지"만큼 무의미한 이야기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업무"의 범위에 어쩌면 의뢰인에 대한 최소한의 위로가 포함되어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본디 위로라는 것은 상대방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뒤에 가능한 것인데, 변호사들, 우리만큼 상대방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위치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이 이 기나긴 싸움에서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는 최고의 조력자이자 동반자가 되어야 하는 것 같다. "극단적 T형 인간"이라며 품평하던 나의 동기들에게 짧은 경험으로 필자의 피까지 차가운 것은 아니라는 핑계를 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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