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당신의 최고의 순간은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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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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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늦은 밤 선배님께 전화를 걸었었다.



국선 변론 사건 때문에 며칠 동안 잠에 들지 못했고, 결론이 나지를 않아 지혜를 구하고 싶었다.
"박변, 무죄를 받는게 쉬운게 아냐. 검사도 생각이 있으니까 공소유지 하고 있겠지..."
해답을 얻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늦은 밤 민폐만 되었구나 후회하며 담배를 껐었다.



피고인은 70대 노인으로, 몇 년 전 대기업을 정년퇴임한 분이셨다. 젊은 날 사별하고도 남다른 성실함으로 자녀들을 잘 키워냈다. 퇴직 후 우연히 알게 된 여성과 재혼을 한 것이 문제였는데, 재혼한 여성은 마을 사람들로부터 수억원을 대여하고도 변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피고인은 알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안타까운 마음에 채무자들에게 일부 변제를 해주기도, 연대보증 각서를 작성해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여금이 회수되지 않자 채권자들이 두 사람을 사기죄로 고소 하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여성은 즉시 남성과 별거를 시작하며 대형 로펌 변호사들을 선임해 무죄를 주장했고, 아내의 빚을 갚다가 재산을 탕진한 피고인에게는 필자가 국선 변호사로 지정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피고인은 젊은 국선 변호사 앞에 앉아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모두 나의 불찰이고 내가 지고가야할 업보이며 피해자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법정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형을 살며 반성하겠다는 그의 무거운 한마디 한마디에는 삶을 포기한 자의 습한 암울함만이 남아있었다.



"아내 분이 빌린 돈의 액수가 얼마인지 그리고 어디에 사용했는지 아십니까?"



피고인은 답이 없었다. 모르기 때문이리라. 그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고 어떻게 지금을 풀어나가야할지 포기한 눈빛이었다.



필자는 몇 달간 피고인과 수 차례 대화를 나누며 필자는 그의 무죄를 확신했다. 죄가 없는 사람을 변호해야하는 나와 없는 죄를 인정하고 교도소에 가겠다는 피고인. 그 시절 나에게는 세상이 이리도 잔인한 선택의 순간이 있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문제는 우리나라 제1심 재판 무죄율은 1%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고, 만일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피고인에게 유죄가 인정된다면, 죄가 충분히 성립됨과 동시에 이를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가중 처벌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5년 전 필자는 지금보다 용기있는 변호사였던 것 같다. 첫 변론기일 당시, "재판장님, 피고인 공소사실 전부 인정하고 처벌을 구하고 있으나, 본 변호인마저 같은 주장을 한다면 오늘을 후회할 것 같습니다." 라는 이상한 변론을 했다.



잠시 적막이 흘렀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던 검사와 실무관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저 무슨 한심한 변론인가 했을 것이다. 헌데 적막을 깬 것은 검사 측이 제출한 증거 기록을 꼼꼼히 읽어본 판사였다.



"본 판사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피해자 측 진술을 볼때 피고인과 피해자들은 이 사건 금전 대여 당시에는 알지도 못했던 것 같아요. 변호인 측 증거 인부 다시 해보시고 검사 측 증인 신청 준비하시죠."



눈물이 핑 돌았다. 잠 못자고 고민한 순간들이 헛되지 않았고 세상에 나와 같은 시각으로 피고인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이가 있다는 것에 큰 위로가 되었다.

법정에 있던 피고인도 그제서야 본인이 억울한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본격적으로 무죄 주장을 하고 피해자들로부터 대여계약 당시 나의 피고인을 알지 못했다는 진술을 바탕으로 무죄를 받아낼 수 있었다.


매해 첫 날.
필자는 가끔 당시 판결문을 열람해 보고는 한다. 30만 원 국선변호인 수당을 받고 1년 간 사투를 벌인 사건이었고 아직도 당시만큼 열정적으로 임한 사건이 없다. 매년 1월. 그 판결문을 정독하며 나에게 당시의 열정이 남아있는가 물어본다.



우리는 새해가 오면 많은 다짐을 하고 새로운 계획을 짜며, 하루 하루를 새로운 날로 채워간다.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기회는 우리에게 큰 정화의 순간이 된다.



그러나 가끔은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돌아보며 우리의 열정을 상기시키는 것도 새해를 시작하는 좋은 정신적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경험담으로 한 해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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