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숨겨진 의무. 효도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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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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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요리를 한다.

봐도봐도 끝나지 않는 소송기록 속에서 허우적대거나, 종일 누군가의 고통 속을 동행하다보면 지칠 때가 있는데 이때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는 단순한 손 동작이 큰 위로가 된다. 재료를 씻고, 칼로 다듬고, 불을 덧대어 만들어진 짧은 순간의 결과물이 가져오는 성취감이 힐링이 된달까.

지난 주말 저녁, 아이가 먹을 불고기를 볶고 있는데, 아내가 다가와 사진을 찍는다. “나중에 사춘기 오면, ‘아빠가 이렇게까지 했다.’ 하고 보여줘야지!” 찰칵하는 휴대전화 소리에 웃음지었다. 아이에게 효도를 받겠다는 애달픈 희망은 전혀 없지만 철없던 필자를 닮아 언젠가 거친 사춘기를 겪는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싶다.

문득 “효도각서” 사건이 떠올랐다. 많이 알려진 사건인데 대략 이러하다[대법원 2015. 12. 10. 선고 2015다236141 판결].

A에게는 자녀 B가 있었다. A는 B가 자신을 충실히 부양할 것을 조건으로 수십억 원 가치의 부동산을 증여하고 소위 효도각서를 작성했다. 이후 A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져서 결국 혼자 생활이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는데 B는 A를 요양시설로 보내려고 하거나 막말을 하는 등 각서 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결국 A는 자녀에게 증여한 부동산의 소유권이전등기말소소송을 진행, 결국 A의 승소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해당 판결문을 보며 인상 깊었던 것은 ‘충실히’ 부양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활능력이 없는 사람을 돌본다는 것을 넘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과 성실함을 의미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재판부가 설시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효도각서 상 기재된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해석한 것이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받아온 시간을 기억하고 변제할 숨겨진 의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뉴스에 나오는 흉악한 부모들의 학대가 강조되어 그렇지 사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를 사랑하는 본능으로 최선을 다한다. 완벽한 양육은 아니었을지언정 자신의 환경에서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만은 같을 것이다. 짧지 않은 그 순간의 희생들을 우리가 기억해야함은 우리가 다시금 자녀들에게 그렇게 기억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생전 증여를 하려는 경우에는 가급적 계약서를 작성해 두는 것이 여러모로 양 당사자에게 불필요한 분쟁을 키우지 않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본디 주는 사람은 기억하기 쉬운 것을 받는 이는 쉽게 잊는 법이기에 증여를 받은 자녀들에게도 어디까지의 의무가 부여되는지를 명확히 해 두어야 한다.

이 때 효도각서의 기본 요건을 갖추는 것이 필요한데, “효도의 내용”과 “미 이행시의 효과”를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부양을 한다.’ ‘효도를 한다.’ 정도로 작성할 것이 아니라 동거의 의무, 부양료의 지급일자와 액수, 기타 세부적인 부양 의무 등을 명확히 특정하여 누가 보아도 어떠한 의무가 있는지를 확정해 둬야 한다. 또한 이를 위반할 시 “증여받은 토지를 반환한다”등과 같이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는지를 반드시 기재해야 한다.

양 당사자가 의무와 효과를 명확히 기억하고 있어야 생전 증여를 재판으로 돌려오는 불상사가 발생할 위험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 효도각서 사건과 같이 증여와 동시에 돌변한 자녀들에게 증여한 재산을 돌려받는 증여계약해제 소송에서는 부담부증여계약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계약서의 존재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어릴 적 필자의 아버지는 늘 밤 9시가 넘어 퇴근했다. 그 먼 직장을 늘 자전거로 출퇴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 고된 삶이었다. 요즘같이 추운 날, 차가운 바람을 가르고 대문을 열고 들어던 그의 점퍼에는 냉기가 가득했으나 그에게 안긴 나의 품은 금세 따스해졌다.

한 해의 마무리가 다가오는 오늘, 오랜만에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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